'기', '승'까지는 죽어라 고생하고 '결'은 커녕 '전' 조차 알 수 없는 말단 직원, 부품으로서의 삶

나는 내 업무를 왜 하는지 알고 싶었다


첫 회사를 대기업에서 시작하는 것은 대체로 안전한 선택이다.
체계적인 조직, 잘 정리된 이전 프로젝트들의 기록, 모르는 것은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선배들과 동기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정확하고 그 일만 잘 해내면되는 아주 심플한 시스템.

이 것들과 함께 사회에 첫 발을 딛었다.

험난했던 주니어 시기가 지나고 업무사이클을 크게 몇 바퀴쯤 돌아보니
'일이 손에 잡힌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일도 회사도 편해졌다는 만족감도 들었지만 안락함은 한순간이었고,
문득 내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 일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평생할 수 있을것인가?

 

나는 내 시간과 경험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 입사 첫 해부터 선배들도 꺼려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양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똑같지만 더 어렵고 더 바쁘게 살아야 질적으로는 다른 시간을 보낸 것이니까.

그러나, 큰 성취나 (자기만족적인)보상이 따를 것으로 기대했던 그 도전도 결국은 루틴한 업무 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을 느껴버리고나니 근본적으로 직무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일었고 나의 적성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이 일을 평생하지는 못하겠다.

 

취업을 준비할 때는 나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아 답답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나의 미래가 너무나도 뻔히 보여 참담해졌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젊고, 세상에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너무나 많고, 그것들을 위한 괜찮은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이 많이 남아있었다. 제대로 써보지도 않았으니 사실 남았다기보단 축적된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쪽에 가까운 것들.

 


나의 단점은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현재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만, 자기반성을 넘어 곧잘 자기혐오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퇴사 결심이 서기까지 가장 크게 기여한 것 또한 바로 그 '스스로에게 질문하기'였다.
이전까지의 질문들은 나의 능력, 자질 등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짜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6개월이 넘는 직무에 대한 고민 과정에서,

  • 나는 내일이 기대되는, 설레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고
  • 나는 아직까지는 일에서 재미와 자아성취를 찾고 싶은 사람이고
  • 나는 워라밸 좋게 칼퇴근해도 뭔가 특별히 하고 싶은게 없는 사람이고
  • 차라리 성취와 성과가 확실하다면 야근도 괜찮은 사람이고
  • 특정한 파트만 담당하는 것보다 사업이 시작하고 흔들리고 마치는 전주기의 과정이 궁금한 사람이고
  • 누군가의 삶을 바꿀 가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고
  • 내 인생이 좀 더 재밌고 남다른 이야기로 가득하길 바라며
  • 도전과 경험으로 가득했던 20대를 넘어 30대에는 기승전'결'까지 있길 기대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흰 봉투에 한자로 사.직.서.를 써서 안주머니에서 스윽- 꺼내는, 어렸을 때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나의 퇴사 과정은 드라마 장면 못지 않게 제법 비장했다.

첫 퇴사여서 그런 것일지, 퇴사란 늘 그런 것일지.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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